삶의 지침으로서 철학을 공부하고 싶은 누군가가 실존주의 철학부터 조우할 경우 좀 동떨어져 있다고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내 얘기다.
물론 지침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공감이나 유희 차원에서 사르트르 작품을 접한 사람들은 극찬을 아끼지 않는 듯하다. goodreads를 보아도 <구토>를 읽고 감동한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다.
전쟁 전후 지식인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그리고 대중에게도 책임 의식을 불어넣기 위해 철학을 세운 것은 멋진 일이다. 그리고 존경스럽다.
하지만 사르트르의 철학을 내 삶에 적용하기란 쉽지 않아보인다.
실존주의 철학은 이전의 실증주의 철학을 비판하고, 딛고 일어서며 등장했지만 글쎄, 앞의 것이 결과적으로 현대 사회에서 더 유용한 역할을 하지 않았는가 묻게 된다.
사르트르를 위시한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생에 던져진 인간의 고독, 불안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 주장을 쌓아나가지만, 20-30년 후 이기적 유전자, 코스모스 같은 과학 서적들이 철학의 질문에 명쾌하게 답해주지 않았나...? 라는 생각이 든다.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는 것, 그리고 인간은 대자로서 즉자와 구별된다는 실존주의의 핵심 주장을 이해하는 데는 이기적 유전자를 읽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기적 유전자는 철학서가 아님을 저자가 분명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인간의 유한함과 인류 평화의 필요성을 환기하는 데는 코스모스가 더 효과적인 것 같다. 더 구체적이고, 더 생생하고, 더 직설적이다.
과학을 보위하려는 건 아니다. 철학만큼 오래되었지만 수학은 철학과 달리 누적적으로 발전해왔다. 일례로 임의의 실수보다 큰 자연수가 항상 존재한다는 아르키메데스 성질은 수천 년이 지난 후에도 해석학의 중요한 토대를 이룬다. 그리고 많은 예술 작품도 실존주의 철학보다 유익하다고 느낀다.
특히, 실존주의 문학은 실존주의 철학과 별개이고, 유익하고, 의미 있고, 재미있다. 사르트르 본인은 철학자와 작가를 구분 짓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그의 희곡은 재밌다. 도스토예프스키나 카뮈의 실존주의 문학 작품도 엄청 재밌게 읽었다.
문학은 일반화의 함정에서 자유롭다. 그저 주인공의 삶을 그려낼 뿐이기 때문이다. 그 삶을 보면서 독자가 알아서 느끼고, 수용하면 된다. 반면 실존주의 철학은 "인간은 ~~하다"라는 일반화를 시도해서 좀 불편하다. 무슨 주장을 만날 때마다 '난 아닌데?'라고 계속 답하게 된다.
이런 감상에 대해서 언젠가 철학의 내공 깊은 분에게 여쭤보고 필요 시 교정도 받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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